KCC OB 이인명 솔루텍시스템 대표이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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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에 대한 인식이나 인프라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돼 있던 시절, 컴퓨터 판매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창립 50주년을 맞아 KCC정보통신의 프라임 성공시대를 이끈 주역 이인명 솔루텍시스템 대표이사를 만났다

1967년 KCC정보통신의 전신 한국전자계산소와 함께 여명을 밝힌 이래, 고가 의 중대형 컴퓨터가 주류를 이뤘던 우리나라 IT산업은 1970년대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디지털 이큅먼트(Digital Equipment Corp., DEC)의 PDP와 VAX,  데이터  제너럴(Data  General)의  노바(NOVA),  왕레버러토리즈 (Wang Laboratories) 왕(Wang) 등의 미니컴퓨터가 몰고 온 거센 세대교체 바람이 1970년대 중반 국내에 상륙, 눈부신 컴퓨터 보급 성과를 이끌며 국내 IT산업의 개화기를 열었다.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반까지 십 수 년 동 안 당대 최고 메이커들의 각축전이 펼쳐진 국내 미니컴퓨터시장을 석권한 것은 KCC정보통신(당시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의 프라임50 시리즈였다. IBM, DEC, DG 등 쟁쟁한 선발주자들에 밀려 고전하고 있던 프라임 컴퓨 터(Prime Computer)가 거둔 성공에, 미국 본사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단 한 번도 최고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프라임이 한국에서만큼 은 넘버원이라고 흡족해하면서, 이 같은 성과를 일군 KCC정보통신을 향해 엄 지손가락을 치켜세웠던 것.  창립 50주년을 5개월 앞둔 6월의 첫날, KCC정보통신의 프라임 성공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인 이인명 솔루텍시스템 대표이사를 만났다.

Q 반갑습니다. 우리회사의 성장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프라임의 성공은 KCC정보통신 50년사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프라임 도입배경 이 궁금합니다.
A KCC정보통신이 프라임 컴퓨터와의 인연은 1977년입니다. 미니컴퓨터 시 대의 개막을 예견한 이주용 회장께서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국내 총판계약을 체 결했지요. 프라임 판매를 개시한 1970년대 후반에는 그다지 큰 반응이 없었습 니다. 컴퓨터시장에서 프라임 컴퓨터는 후발주자였고, 브랜드 파워가 크지 않 았어요. 제가 영업에 합류한 1983년까지 프라임 기종을 도입한 관공서나 기업 체 수가 20~30개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프라임은 탁월한 네트워크 성능을 갖췄으면서도 가격경쟁력까지 뛰어 난 기종이었고, 곧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간 400대가 훌쩍 넘게 팔렸죠. 앞서 시장을 내다본 이주용 회장의 혜안이 빚을 발 했던 셈입니다.

봉고에 선명히 박혀있는 KCC 마크

봉고에 선명히 박혀있는 KCC 마크

Q 선배께서 활약했던 시기와 프라임 성공 시기가 완벽히 일치합니다(웃음). 원 래 SE로 출발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세일즈맨으로 전환한 후,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A 1980년 SE로 입사해서 프라임을 구입한 고객사의 소프트웨어 개발업무를 맡았습니다. 3년 정도 프라임을 갖고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니 스스로 프라임 매 력에 빠져들게 되더군요. 당시는 소프트웨어에 비해 하드웨어시장이 비약적으 로 성장하던 시기였고, 직접 영업을 뛰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 자원해서 영업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때를 같이 해 프라임 인기가 치솟 기 시작했어요.

Q ‘운이 좋았다’는 너무 겸손한 표현입니다. 당시 선배께서는 적극적인 영업을 펼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A IT에 대한 인식이나 인프라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돼 있던 시절이기에 ‘컴퓨터 판매’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객사를 처음 찾아갈 때는 으레 ‘컴퓨터’가 무엇을 하는 도구이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개 념부터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온라인 입찰 같은 건 꿈도 못 꿀 때라 마감 날에 는 입찰서류를 들고 뛰어가야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결국 ‘기동성’이 관건이 되 더군요. 회사에서 배정하는 자동차만으로는 부족해서 당시로서는 적잖은 사비 를 들여 ‘포니2’ 승용차를 중고로 구입, 직접 운전해서 영업을 다녔습니다. 그 시절을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여건이 뒷받침됐다는 거죠. 예를 들어 KCC정보통신은 당시부터 굉장히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도를 운영했 습니다. 승용차를 몰고 영업을 다니는 것보다 이게 훨씬 더 드문 일이었어요. 한창 때는 서울시내 아파트 한 채 값에 달하는 돈이 1년치 인센티브로 지급되기 도 했지요. 최첨단 직종에 종사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정신적·경제적 만족감이 아주 높았습니다.

1992년 미국 프라임 본사 방문 당시

1992년 미국 프라임 본사 방문 당시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까?
당시에는 ‘유저 컨퍼런스’라고 해서 고객사를 인솔, 미국 프라임 컴퓨터 본사를 방문하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했습니다. 한 번은 컨퍼런스 일정을 마치 면서 고객사 분들이 돈을 걷어서 주더라고요. 일종의 가이드 페이였습니다. 고 객들 요청으로 쇼핑센터에 들르면 구매액 중 일부를 커미션으로 돌려주기도 했 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출장업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그 돈을 받을 수가 없어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고 고객 한 분 한 분께 액자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지금도 그 때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죠. 프라임 영업을 하면서 정말 숱한 관공서·기업체들을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사는 조흥증권입니다. 프라임 P2455 기종을 30대나 도입한 빅 클라 이언트여서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몇 달 동안을 조흥증권 본점에서 상주하다 시피 했습니다. 경쟁이 워낙 치열해 설득이 쉽지 않았는데 먼저 시스템을 도입 한 고려증권의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공급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성공시켰습니다. 판매형식을 취했지만 같은 증권사까리 소프트웨어를 공유한다는 게 결코 쉬운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증권의 패키지를 통해 조흥증권의 전산화가 빠르게 완성됐고, 고려증권과 KCC는 판매이익을 얻었으니 결과적으로는 3자 모두가 만족한 계약이 됐죠.

Q KCC정보통신을 떠난 후에도 IT분야에서 성공한 기업인의 길을 걸으며 귀감 이 되고 있습니다. 성공비결이 궁금합니다.
A 1996년에 솔루텍시스템이라는 DB/DW 토털서비스회사를 설립해 경영하고 있습니다. 벌써 21년이나 됐네요. 사실 이 정도까지 회사를 성장시키고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데는 KCC정보통신에서 얻은 경험이 큰 자산이 됐습니다. 보통 IT산업의 경쟁력이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보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IT산업의 경쟁력은 사람과 시스템의 조화에 서 나옵니다. 회사 입구 사명(社名) 아래에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구를 새겨놓 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온전히 KCC정보통신에서 얻은 깨달음이죠. 돌이켜보면 KCC정보통신에서 근무하던 시절만큼 열정 넘치던 사 람들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경영자들도 열정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동 기와 보상을 주었죠. 이런 경험을 통해 한 회사의 경영자로서 본 받기 위해 노 력하죠. 직원들의 노력에 어떤 보상과 동기부여 를 해줄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25년 전 사진

25년 전 사진

Q KCC OB활동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 워낙 많은 추억을 쌓았던 곳이었던 만큼 옛 동 료들을 만나는 기쁨이 큽니다. 국내 IT산업의 맏 형 기업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분들 과 만나 소중한 정보를 나누기도 하죠. 1999년 에 발족시킨 OB 골프모임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 습니다.

Q KCC정보통신이 창립 50주년을 앞두고 있습 니다. KCC의 한 시대를 이끈 선배로서 후배들에 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A 제가 KCC정보통신에 몸담고 있던 시절과 비 교해보면 현재의 IT산업 환경은 너무나 많은 변화 를 겪었고, 또 직면해 있습니다. 성장을 가로막는 질곡도 많았고, IT산업 전반 자체가 엄청난 레드 오션이 됐죠. 이런 어려움 속에서 반세기 역사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 만 여러분들은 현재 국내최고 역사의 IT기업에 근 무하는 것이고 그 곳에서 역사의 한 부분을 열어 가고 있습니다. 자부심을 갖기 바랍니다. 여러분 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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