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랜드로버는 이 날을 ‘랜드로버 데이’라 부르며 공식적으로 70주년을 축하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8년 4월 30일, 랜드로버는 암스테르담 모터쇼에서 대중 앞에 기념비적인 첫 4륜구동 차량을 선보였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약 3년이 지난 때였고, 전쟁 당시에 미군이 사용하던 4륜구동 차량은 랜드로버의 개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랜드로버는 군용 4륜구동차를 닮은 실용적인 모델인 ‘시리즈 I’으로 시작했지만 단순한 작업용 오프로드 차량의 개발에 머무르지 않았다. 독창성과 개척정신을 바탕으로 레인지로버와 같은 ‘럭셔리 SUV’ 장르를 처음으로 개척한 회사가 바로 랜드로버다. 랜드로버의 ‘레인지로버’는 세계 최초의 럭셔리 SUV로 일컬어지며, 랜드로버가 작년에 선보인 ‘레인지로버 벨라’는 2018 월드 카 어워드의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로 선정되었다.
한편으로 화려함 속에서도 랜드로버는 초심을 잃지 않는다. 랜드로버가 ‘사막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한 화려함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럭셔리 SUV와 경합을 벌일 때도, 랜드로버의 차량은 언제나 오프로드 주행성능 만큼은 최고라 일컬어졌다. 강인함과 아름다움, 랜드로버는 언제나 SUV의 정점을 추구해왔다.
랜드로버의 태동, 시리즈 I에서 디펜더까지
랜드로버가 처음부터 SUV 전문 메이커를 표방하며 다양한 차종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랜드로버의 시작은 시리즈 I이라 불리는 심플한 디자인의 튼튼한 오프로드 4륜구동 차였다. 시리즈 I의 외양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윌리스 지프’와 닮았다는 점은 아무래도 ‘4륜구동 다목적차량’이라는 콘셉트 때문 아닐까? 시리즈 I은 박스형의 차체 뿐 아니라 캔버스 소프트탑을 장착하거나 픽업트럭, 캐빈이 완전히 오픈된 모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형이 만들어졌다.
또 랜드로버는 민간용으로 판매가 시작되었지만, 이후 군용차량으로도 전 세계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영국군이 지프의 도입을 검토하며 임시로 랜드로버를 사용했는데, 그 성능과 내구에 크게 만족했기에 랜드로버의 도입을 결정했고, 1956년부터 영국군의 작전차량으로 활약하게 된다. 랜드로버는 세계 각국에 파견된 영국군, 그리고 여러 영 연방 국가에서도 널리 사용되며 튼튼하고 신뢰할만한 오프로드 차량으로 이름을 알린다.
또 밀리터리 마니아라면 영국군의 랜드로버, 특히 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활약했던 SAS의 정찰용 차량인 ‘핑크팬더’를 모를 수 없다. 1960년대 영국군은 아라비아반도의 사막지역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차량이 없어 랜드로버에 개발을 의뢰했고, 랜드로버는 시리즈 IIA 군용 모델을 베이스로 장거리 정찰용 4륜구동 특수작전차량 72대를 만든다. 이 특수차량에는 기동작전용 기관총좌와 연막탄발사기 등이 설치되고, 최대 6주간 작전이 가능한 연료와 물자 그리고 모래에 바퀴가 빠졌을 때 탈출하기 위한 철판을 실었다.
이 특수 제작된 랜드로버 109시리즈는 작전지역 현지에서 사막의 석양아래 위장효과가 뛰어난 데저트 핑크로 칠해졌고, 이후 분홍색 표범이라는 의미의 ‘핑크팬더(pink panther)’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영국 SAS의 작전차량으로 활약한다. 이후 작전지역을 옮기며 다시 녹색으로 칠해졌지만, 핑크팬더라는 애칭은 SAS 랜드로버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계속 따라다니게 된다.
민간용으로 판매된 랜드로버들 역시 다양한 모델이 있다. 1958년부터 판매가 시작된 시리즈 II는 시리즈 I보다 더욱 다양한 장소에서 활용되었다. 휠베이스를 늘리고 캐빈의 크기를 키워 앰뷸런스는 물론 무려 10명의 인원을 태울 수 있는 스테이션왜건이 당시 ‘버스’로 차량등록 되어 사용되었을 정도다.
다목적성을 극대화하기위해 운전석을 아예 엔진 위로 옮긴 모델도 있다. 모습에선 SUV보다 트럭이라 해야 할 것 같지만, 동일한 엔진과 차체를 사용하는 엄연한 랜드로버다. 소방차에서부터 공항의 항공기 견인차량이나 특수공사차량에 이르기까지 랜드로버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1971년에는 후속모델인 랜드로버 시리즈 III가 만들어진다. 이 시리즈 III는 가장 널리 사용된 랜드로버로 일컬어진다. 1976년에는 100만 번째 랜드로버가 생산되었고, 시리즈 III은 1985년까지 무려 44만대가 넘는 수의 차량이 만들어진다. 엔진의 출력을 높이고 무게를 가볍게 한 모델도 존재하며, 레크리에이션으로서 오프로드 드라이빙을 즐기는 운전자들을 위한 옵션도 강화되기 시작한다. 인테리어의 고급화나 방음성능을 향상시킨 모델도 등장한다.
랜드로버의 상징이라 할 각진 모양은 유지되었지만, 시리즈 I, 시리즈 II와 달리 금속 철망이 아닌 플라스틱 소재의 그릴이 적용된 것으로 시리즈 III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한편 이때는 랜드로버의 라이벌들이 속속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오프로드 유틸리티 차량 시장은 점점 커졌지만, 토요타 랜드크루저와 같은 모델 역시 빠르게 성장하며 랜드로버의 추격해왔다. 랜드로버 시리즈 III은 1985년을 마지막으로 생산 종료된다.
한편으로 랜드로버는 1970년부터 ‘레인지로버 클래식’ 시리즈를 출시하며, 이를 통해 오프로드 차량의 뛰어난 험로주파성능에 ‘안락함’을 더한 풀사이즈 SUV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한다.
랜드로버는 1983년부터 90, 110이라는 시리즈 III을 계승할 후속모델을 선보이는데, 이 모델들은 1989년부터 미드사이즈 SUV 디스커버리가 출시되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해 ‘디펜더’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디펜더를 랜드로버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모델이라 보는 이유가 바로 시리즈 I에서 이어지는 계보 때문이다. 랜드로버 90, 110이라는 이름은 휠베이스 길이를 인치로 표기한 것이며, 이어 보다 긴 휠베이스를 가진 127과 같은 모델도 등장한다.
초창기의 엔진은 시리즈 III과 같은 것을 사용했으나 이후 더욱 강력한 출력을 가진 엔진을 장착한다. 기본이 되는 4기통 엔진 외에도 랜드로버는 레인지로버에서 가져온 강력한 V8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웍스 모델을 출시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랜드로버는 고난의 행군이라 할 시기를 보낸다. 랜드로버는 1989년 말 레인지로버와 디펜더의 중간이라 할 수 있는 포지션의 미드사이즈 SUV 디스커버리를 처음 출시하고, 1997년에는 소형 SUV 프리랜더를 런칭 한다. 소형 SUV에 대한 아이디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프리랜더는 1994년 회사가 BMW 그룹에 의해 인수된 후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모델이다.
그러나 랜드로버는 로버 그룹과 분리되어 2000년에 다시 포드에 매각되고, 2세대 프리랜더는 포드의 엔진과 플랫폼을 이용해 개발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2008년, 랜드로버는 재규어와 함께 다시 타타그룹에 의해 인수된다. 타타그룹 인수 당시만 해도 랜드로버의 추락을 예상하거나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타타그룹은 재규어와 랜드로버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와 함께 영국 생산, 문화와 역사를 비롯한 ‘영국차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성공적으로 다시 한 번 이들 브랜드의 전성기를 일으켜냈다.
한편 디펜더는 회사의 매각과 더불어 엔진이 BMW, 포드로 바뀌는 등의 변화를 겪기도 했으나 오리지널 랜드로버의 모습을 유지하며 계보를 이어왔다. 그러나 2016년을 마지막으로 랜드로버는 디펜더의 단종을 결정하게 된다. 낡은 플랫폼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가의 안전 및 환경기준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체 강성은 충분하더라도, 에어백이 장착되지 않았을 만큼 오래된 플랫폼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예고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랜드로버는 공식적으로 디펜더를 단종 시켰음에도 올해 1월 디펜더 웍스 V8 창립 70주년 모델을 내놓는 등 여전히 중요한 아이콘으로 여기고 있다. 랜드로버는 디펜더 단종 이후 이를 대체할 모델을 모색하면서 휠베이스 100인치의, DC100이라는 소형 SUV 콘셉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리지널 디펜더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수많은 랜드로버 팬들의 혹평을 받았다. 랜드로버는 DC100이 콘셉트일 뿐, 디펜더 후속모델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현재 랜드로버의 정통성을 보여줄 디펜더의 자리는 공석이다. 디펜더는 잠시 쉬어가지만, 머지않아 시리즈 I에서 시작된 랜드로버의 정통성을 이어나갈 디펜더를 조만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랜드로버는 신형 디펜더를 개발 중이며, 2019년에 모습을 드러내며 양산되기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 가지 더, 그동안 디펜더가 랜드로버를 상징하는 중요한 모델임에도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만나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신형 디펜더라면 아마 우리나라의 도로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때는 아마 2020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랜드로버의 전통을 상징하는 정통파 SUV, 차세대 디펜더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기사출처 – RIDE MAGAZINE(http://www.ridemag.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