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TO THE KCC (OB들의 진솔한 이야기)_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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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KCC가 있기까지 수많은 희로애락을 함께한 OB들의 진솔한 이야기. 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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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1975년 입사해 DATA 100, 프라임 등 하루하루 기계와 씨름을 멈출 수 없는 CE 생활을 했다. 1989년 한국전자계산으로 리페어 부문이 독립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KCC 서비스에서 시스원으로 회사 이름만 수차례 바뀌었을 뿐 고객이 부르면 달려가는 ‘을’로 평생을 살았다. 1980년대 후반 김포 출입국사무소에 여권 조회 시스템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추석이라 집에서 차례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스템이 다운됐다고 연락이 왔다. 여권 조회 시스템이 마비되면 출입국 전체에 지장이 초래되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숨이 넘어가는 담당자에게 “절만 드리고 바로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전화기 너머로 바로 육두문자가 날아왔다. CE 조직은 문제가 일어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나와 동료들이 해결을 못 하면 결국 미국 본사에 SOS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자칫 크게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아파트 한 채 값이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이후 프라임의 시대가 저물고 흔히 TPM이라고 하는 사업 모델을 마련해 출구를 찾아냈다. 소규모 판매업체와 연합해 판매까지 연결지으면서 사업을 확장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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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규
1972년, 8개월 정도 KCC의 정규 OJT 교육을 수료했다. 당시 KCC는 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컴퓨터 교육기관이었다. 코볼 등의 컴퓨터 언어를 주로 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1982년 기획조정실 차장으로 입사했다. 패트롤(Patrol)과 파일넷(Filenet) 등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다뤘고, 국방부에 프라임도 납품했다. 프라임과 관련해 재밌었던 기억은 메인 프레임보다 부피가 작았던 프라임을 전산실에 설치해놓으면 항온장치나 스토리지에 비해서도 크기가 작았다. 그렇다 보니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본체는 내버려 두고 부속 장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대개 높은 분들 이어서 옆에서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곤 했다. 재밌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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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준
1987년, 프라임컴퓨터와 컴퓨터 비전의 합병은 나를 비롯한 서울일렉트론 직원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일렉트론의 인력들은 모두 KCC라는 낯선 곳으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20여 명에 달하는 서울일렉트론 출신 인력 중 가장 불안감이 컸던 사람은 가장 선임자인 나였다. 하지만, 경영진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KCC에서 빠르게 적응했다. 당시만 해도 KCC는 자금집행 계통이 명확하지 않아 영업비 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사정으로 어느 날 나는 다짜고짜 강원윤 사장님을 찾아가 하소연 했다. “사장님, 저희 캐드캠 사업은 단위가 크고 경쟁업체가 많아서 빨리 대응 해야 합니다. 급히 출장을 다녀와야 할 일도 많은데 자금집행이 더뎌지면 영업에서도 손해를 입을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맹랑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강원윤 사장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노란 봉투 하나를 손에 쥐여주셨다. 200만 원이 들어있었다. 당시로써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렇게 급하다니 이거라도 우선 가져다 쓰게.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하고. 앞으로 자금집행이 늦어지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치를 해놓겠네.” 그때는 급한 대로 돈을 받아 사용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이 강원윤 사장님의 월급이었다는 사실을 한참이나 지나 알게 되었다. 리더의 희생정신이 돋보였던 기억이다. 이주용 회장님과도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부름을 받고 들어갔더니 난데없이 공연 티켓 두 장을 주시면서 말씀하시길 “이봐! 당신 내가 계속 주목하고 있어.
비록 내 품 안에 키운 KCC 출신은 아니지만, 한시도 당신이 밖에서 온 식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 부인께 안부 전해 주고 모처럼 오붓한 시간 보내게나.” 늘 어렵게만 보이던 회장님이었는데 그 날 따뜻한 면모를 느끼고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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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기
또래와는 달리 나는 베트남 전쟁에서 처음 컴퓨터란 기계를 접했다. 함께 참전한 미군 부대에 장갑차를 반납하러 갔을 때 그 부대가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 담당자와 친분을 쌓다가 그분에게 컴퓨터의 기초를 익힐 수 있었다. 귀국 후 한국전자계산소에 취직해 오퍼레이터로서 당시 농협의 환업무를 맡아 회당 200박스 되는 송금업무를 수행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타 회사 전산실에 근무하면서 새로운 기종을 도입할 때는 언제나 KCC와 상의했다. 개인 사업을 오래하면서 철저하게 무차입 경영을 고수하고 있는데, 배울 점이 많은 이주용 회장님 덕에 얻은 노하우다. KCC는 이제 국내 IT산업의 맏형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업계를 건실히 이끌어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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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1967년 6월, 한국전자계산소 1기생으로 입사해 SE부장을 맡아 5년간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 시절에는 밥 먹듯 야근을 하고 ‘대림장’이라는 여관에서 아침을 먹던 기억이 난다. 나는 종종 사우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저녁 식대 지급이나 급여 인상 등을 요구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이주용 사장님은 나를 ‘노동조합장’이라 부르시곤 했다.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이주용 사장님은 사원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셨다. 또 명절 때가 되면 보너스 대신 시내 유명 양복점에 데리고 가서 코트나 양복 등을 맞춰주셨다. 회사 차원에서는 절세가 됐고, 직원들도 고객을 만나러 갈 때 절로 멋이 났다. 그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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