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시절, 컴퓨터 데이터와 싸움을 벌여야 했던 홍정의 선생.
오랜만에 한국 나들이에 나선 홍정의 선생과 그 시절을 추억했다
KCC 정보통신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 그리고 당시에 맡았던 역할도 궁금합니다.
경제기획원 통계국에서 오퍼레이터로 근무했었습니다. 당시 통계국에서 사용하던 데이터처리장치(Electronic Data Processing System)는 초보적인 장비였습니다. 용어도 낯설기만 했죠. 한국
생산성본부 산하 한국전자계산소(현 KCC정보통신)에서 최신 컴퓨터를 들여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입사한 뒤 컴퓨터 오퍼레이터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근무 당시 KCC정보통신은 업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습니까?
한국전자계산소가 FACOM 230-10을 한국에 처음 들여왔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1차로 페이퍼 테이프(Paper Tape)에 구멍을 뚫어 이를 테이프 리더(Tape Reader)에 입력해 CPU에서 작업을 했
습니다. 이런 장비 등을 이용해 각 정부기관과 금융기관에서 위탁 받은 프로그래머를 양성하는 역할을했습니다.
기억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당시 한국에서의 컴퓨터 관련 일은, 그야말로 최첨단 분야였습니다. 자부심이 컸지요. FACOM 222실장 시절이었을 겁니다. 여성이 남자직원을 통솔하는 것이 드물었던 때였어요. 업무지시를 하고 돌아서면, 뒤에서 제 흉내를 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좀 민망했지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들 이해를 하면서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결국 환상의 팀워크를 만들어냈습니다.
IT산업에 종사했던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즐거웠던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한국최초의 첨단기계를 다루다 보니, 누구도 하기 힘든 비밀스러운 업무를 한다는 쾌감이 컸습니다. 여기에다가 당시 이주용 회장님의 차별 없는, 현대적인 마인드의 인사와 포상 등에 힘입어 인정 받는 기분도 가졌지요. 일과 행복 두 가지를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당시 노드롭 그루만(Nothrop Grumman Corp.) 이라는 미국굴지의 항공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얼마 후 가레트 에어리서치 에어로스페이스(Garrett Airesearch Aerospace Co.)에서 세 개의 공장을 책임지는 시스템 애널리스트를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자재 회사인 캐롤라이나 바이올로지컬 서플라이 컴퍼니(Carolina Biological Supply Company)에서 한국담당 역을 맡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식 과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대학교뿐만 아니라 카이스트 같은 연구소에서 필요로 하는 첨단실험기자재 등을 한국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KCC정보통신 OB회원으로 후배들에게 남기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지난해부터 미국에서 KCC OB 회원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끈끈한 동료애를 자랑합니다. KCC정보통신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십시오.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KCC정보통신이 내년 50주년을 맞게 됩니다.
50년 전에는 IT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불모지인 IT업계에 이주용 회장님께서 맨주먹으로 시작하셨고, 지금은 KCC정보통신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간 회장님께서 우리나라 정보통신을 위해 흘리신 땀과 열정이 맺은 결실일 겁니다. 회사를 위해서나 대한민국을 위해서나 엄청난 일이지요. 더욱 번창해서 세계 1위의 기업이 되는 걸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