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을 찾아온 10세대 어코드의 라인업 중 2.0 터보 스포츠는 소문만 무성하던 어코드의 화끈한 질주 성능을 십분 전달하며 호평을 얻고 있다. 가속성능 수치에 대해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은 일본 제조사들의 특성상, 0→100km/h 가속시간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실제 주행해 보면 즉각 체험할 수 있는 역동적인 성능이 입소문을 타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어코드 터보 스포츠는 혼다의 고성능차 세계에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뉘르부르크링 랩타임 최단 기록이야 거의 매년 깨진다. 하지만 FF(프론트쉽 전륜 구동) 레이아웃을 차량의 경우는 지난 2017년 4월 작성된 기록의 주인이 아직 가장 빠르다. 바로 시빅 타입 R이다. 고저차와 블라인드 코너로 악명 높은 노르트슐라이페 20.77km 구간에서, 최고 출력 306ps의 시빅 타입 R은 7분 43초 80의 기록을 세웠다. 특히 이전 기록을 갖고 있던 차종이 기록 작성을 위해 시트도 탈거한 본격 트랙 지향의 자동차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빅 타입 R의 성과는 더욱 놀랍다.
물론 강력한 퍼포먼스 중심의 트랙 주행을 위한 차량이었으므로 양산차와 세팅이 완벽히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스펜션 시스템의 주요 부품들은 대부분 양산되는 타입 R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는 게 당시 엔지니어들의 전언이다. 전륜 맥퍼슨 스트럿, 후륜에 어댑티브 댐퍼를 채용한 멀티 링크 방식이다. 튜닝 마니아들이 중시하는 스태빌라이저바 역시 경량화에만 신경썼을 뿐 특별히 선회 시 후륜 마찰력 유지를 위해 더 조작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빅 타입 R을 기반으로 한 고성능 경주용 차량이 바로 타입 R TCR이다. TCR은 세계 최고 투어링카 레이스 WTCC의 창립자 마르첼로 로티가 투어링카 레이스 진입의 장벽을 낮추고 새로운 드라이버와 팬층을 구현하기 위해 만든 대회다. TCR은 제조사가 각각 다른 해치백 및 소형 차들이 대회 규정에 맞는 동력 성능으로 주행 능력을 겨루는 장이다. 최고 출력은 380ps 수준이나 성적이 우수한 차량에 대해서는 BOP(Balance of Performance)를 적용해 규정 출력에서 일정 비율만큼 제약을 가한다. TCR은 지역별로 치러지지만 BOP는 공통 적용되는데, 현재 시빅 타입 R은 340ps(6,200rpm)로 출력이 제한되어 있다. 최대 토크는 42.8kg∙m(3,800rpm)이다.
시빅 타입 R은 사실 국내에서는 직접 보기 어려운 자동차다. 그런데 지난 8월 25~26일, 영암의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치러진 TCR 코리아 시리즈와 아시아 시리즈를 통해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량이 우수한 다른 아시아 국가의 팀은 물론 국내 팀 역시 타입 R을 선택하여, 혼다 마니아들에게 타입 R의 주행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빅 타입 R을 언급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차종들이 있다. 바로 2.0리터 엔진으로 250ps의 최고 출력을 발휘한 혼다의 컨버터블 S2000과 2.2리터 자연흡기 엔진으로 220ps(7,200rpm)의 최고 출력을 발휘한 6세대 어코드의 유로 R 기종이었다. 마치 레이스카를 방불케 하는 고회전에서의 최고 출력은 혼다 VTEC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절묘한 밸브 타이밍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능도 성능이지만 독특한 배기음으로 마니아들을 만족시켰다.
이 자동차들이 고회전 영역에서 기민하고 디테일한 응답 성능을 갖춘 것은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S2000은 실제로 NSX와 같은 시기, 같은 토치기 공장에서 생산 제작되기도 했다. 터보가 아닌 자연흡기 방식으로 리터당 125ps의 최고 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은 당시 세계 자동차 산업계에서도 혁신적인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S2000은 당시 국내에도 직수입을 통해 운용하는 마니아가 있었고, 현재까지 주요 국내 모터스포츠 이벤트나 자동차 관련 전시에 종종 등장하는 차종이다.
혼다는 지난 2015년, 3.5리터 트윈터보 엔진과 전륜 1개, 후륜 2개의 구동모터를 장착한 2세대 NSX를 공개했다. 6,500~7,500rpm에서 500ps의 최고 출력을 발휘하는 엔진과 전후 각각 47ps, 36+36ps의 최고 출력을 발휘하는 구동 모터의 조합은 상상을 현실로 실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드십 방식으로 마운트된 엔진과 9단 DCT 사이에 구동 모터를 바로 연결하는 구조 그리고 각 바퀴의 마찰력을 각각의 모터가 순간적으로 제어하는 SH-AWD는 상식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NSX 역시 국내에 출시되지 않는 차종이다. 항간에 직접 이 차량을 국내에 들여왔다는 개인 애호가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2017년 서울모터쇼를 통해 선보인 바 있으며 역시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혼다가 지향하는 고성능은 곧 열효율의 최적화라는 인류 과학기술의 근본적 목표와 다르지 않다. 엔진의 동력 성능은 실린더 내 혼합기의 폭발로 생기는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데 있고, 그 손실을 줄일수만 있다면 방법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찾아야 했다. 이런 점에서, 혼다가 S2000, 유로 R 등의 자연흡기 엔진에서나 시빅 타입 R, NSX 2세대 등에서 지향하는 첨단의 방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현재 국내에 시판 중인 10세대 어코드는 명성에 걸맞게 순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기존 3.5리터 SOHC 방식의 VTEC 엔진에 대한 ‘순애보’였던 이들도 2.0리터 VTEC 터보 엔진의 터보 스포츠가 가진 박력은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 기술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혼다는, 방법보다 그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를 직접 겨냥하는 자동차 제조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