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자동차가 전기차(EV) 투자 계획을 대폭 축소하고, 하이브리드 차량(HEV)에 전략적 무게를 싣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전동화 전환을 선언한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빠르게 EV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가운데, 혼다는 이른바 ‘전기차 캐즘(EV chasm)’으로 불리는 수요 정체 구간에서 실리를 택한 셈이다.
혼다는 최근 열린 2025 중기 사업계획 설명회에서, 2030년까지 계획했던 전기차 및 연료전지차(FCEV) 관련 투자액을 기존 10조 엔에서 7조 엔으로 약 30%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미베 토시히로 CEO는 “EV 전환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현재 시장 상황과 정책 환경, 소비자 수요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밝혔다. 그는 “2030년까지 전체 판매 중 EV 비중을 30%까지 끌어올리는 기존 계획은 달성이 어렵다”며, “현실적으로는 20%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혼다의 이 같은 결정은 북미 시장을 비롯한 글로벌 EV 시장 전반의 성장세 둔화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과 캐나다 등 주요 시장에서 친환경차 정책이 완화되거나 보조금 지급 기준이 강화되면서, 소비자 구매력이 예상보다 빠르게 떨어진 것이 전략 조정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혼다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계획 중이던 EV 전용 생산공장의 착공 시점을 2년가량 연기하기로 하며, 사실상 전기차 중심 전략을 재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대신 혼다는 하이브리드 차량에 대한 투자와 생산을 본격화한다. 회사는 2027년부터 2030년까지 총 13종의 차세대 하이브리드 모델을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며, 하이브리드 차량 판매 목표도 기존보다 상향 조정해 2030년까지 연간 220만~230만 대 수준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내연기관 차량 대비 연비를 10% 이상 개선하고, 생산 원가 절감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혼다가 하이브리드 차량과 EV를 동일한 생산 라인에서 제조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차종별로 별도의 생산 구조를 운영했지만, 앞으로는 설비 효율성과 제품 공급 유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제조 체계를 재편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시장의 수요 변화에 더욱 빠르게 대응하고, 생산 비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 혼다의 설명이다.
이번 투자 재조정은 단기적인 전략 변경이지만, 혼다는 여전히 장기적 비전으로서 전기차 전환 목표는 유지하고 있다. 회사는 2040년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신차를 EV 또는 FCEV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다만 당분간은 하이브리드를 중심으로 ‘속도 조절’을 하며 시장 흐름을 예의주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미베 CEO는 “하이브리드는 단순한 과도기적 수단이 아니라, 기술적 완성도와 시장 수용성 면에서 현재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며 “혼다는 소비자에게 신뢰받는 전동화 브랜드로서, 한 걸음 한 걸음 실현 가능한 미래를 그려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결정은 혼다의 전략 변화일 뿐 아니라, 글로벌 완성차 업계 전반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V 시장이 초기 고성장기를 지나 정체 구간에 접어들면서, 소비자와 제조사의 기대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속도 조절형 전동화 전략’이 새 흐름으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점쳐진다.